고등학교 2, 3학년의 선택과목을 3학점으로 개설하는 것이 좋은지 4학점으로 개설하는 것이 좋은지는 지난 206호에서 다루었던 내용인데, 지난 6월 27일, 전남 나주 소재 한국에너지공대(KENTECH)에서 열린 한국진로진학정보원과 광주 및 전남진로진학상담교사협의회가 공동 주최한 호남지역 진로진학상담교사 워크숍에서도 언급이 되었다.
발제에 나선 동국대학교 이재원 책임입학사정관은 고등학교에서 이 문제를 많이 물어보았다며, '대학은 고등학생의 학교생활기록부를 가장 나중에 보는 곳이므로 신입생이 들어와서 학교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서야 판단할 수 있으므로 대학이 3학점이 좋은지 4학점이 좋은지를 말하기는 어렵다며, 학교가 수업을 충실히 운영할 수 있는 학점 기준을 정해야 할 것'이라는 취지로 의견을 밝혔다. 고등학교가 대학에 의견을 물어보는 것은 여러 과목을 배우는 것이 학종 평가에 유리한지 의견을 달라는 뜻이다.
이 문제와 관련이 있는 사항은 학생이 충실히 학습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한다는 문제뿐 아니라 고교학점제를 시행하니 교사가 여러 과목을 담당하게 되어 수업 준비 부담과 학습 지도 부담이 커지고 학기별로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을 기재해야 하니 이 또한 부담이 커져서 고교학점제를 충실히 운영하기 어렵다는 주장과도 관계가 있다.
대부분 과목을 4학점으로 개설한 A고등학교는 2학년 1학기에 문학, 대수, 영어Ⅰ 과목은 4학점 학교 지정, 정보는 3학점 학교지정, 체육 2학점과 이에 더하여 4학점 3과목은 언어생활 탐구, 경제수학, 수학과제탐구, 세계문화와 영어, 사회와 문화, 세계사, 윤리와 사상, 정치, 기후변화와 지속가능한 세계, 물리학, 화학, 음악 연주와 창작, 미술 창작, 일본어, 중국어 등 15개 과목 중에서 선택하도록 했다. 학생이 2학년 1학기 때 배울 과목은 4학점 6과목과 3학점 정보, 2학점 체육 등 29학점이다.
이에 비하여 B고등학교는 2학년 1학기에 학교 지정으로 문학, 대수, 확률과 통계, 영어Ⅰ 과목을 3학점으로 편성했고, 체육 2학점, 일본어와 중국어 중 한 과목을 3학점으로 선택, 미디어 영어, 세계시민과 지리, 세계사, 사회와 문화, 현대사회와 윤리, 물리학, 화학, 생명과학, 지구과학, 로봇과 공학세계, 정보, 생태와 환경 등 12과목 중에서 3학점으로 4과목을 선택하도록 편성했다.
두 학교 학생이 2학년 1학기에 배울 과목을 비교해 보면 3학점과 4학점 편성은 차이가 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학생이 화학・생물학공학부에 지원하기 위해 물리학, 화학, 생명과학을 선택한다고 하면, A학교 학생은 문학, 대수, 영어Ⅰ, 물리학, 화학을 4학점으로 학습하는데, B학교 학생은 문학, 대수, 확률과 통계, 영어Ⅰ, 물리학, 화학, 생명과학 과목을 3학점으로 학습한다. B학교 학생이 수학 1 과목과 과학 1 과목을 더 배운다.
대학 전공과 관련한 과목을 보면 A학교 학생은 문학, 대수, 영어Ⅰ, 물리학, 화학을 4학점으로 학습하는데, B학교 학생은 문학, 대수, 확률과 통계, 영어Ⅰ, 물리학, 화학, 생명과학 과목을 3학점으로 학습한다. B학교 학생이 수학 1 과목과 과학 1 과목을 더 배운다. 여러 과목을 배우는 대신 학습 부담이 크다.
현재 각 학교는 그 학교 학생의 학업 역량과 대입 준비 등을 고려하여 교육과정을 편성했겠지만, 최근 교육과정에서 추구하는 ‘조금 가르치고 많이 배우는 교육’이라는 모토를 머리에 둔다면 과목 편성 학점을 늘리고 과목은 줄이는 방향이 합당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야 교과교육이 내실화될 수 있고, 교사의 다과목 지도, 세특 기재 등의 부담도 줄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시간과 속도를 갖게 해 줄 수 있다는 점이다.
IBDP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제주 표선고에서는 화학을 선택하면 4개 학기 동안 스탠더드 과정은 12학점, 하이어 과정은 20학점으로 배운다. 한 과목을 배우는 시간이 충분하고 4학기 동안 배우는 과목 수는 6개 과목에 불과하다. 각 시도교육청이 적은 과목수에 큰 학점수로 배우는 교육과정에 눈길을 주고 있는 현실이 시사점이 된다. 대학도 과목 수가 적어도 좋으니 충실히 공부한 학생을 선발하겠다고 말해주면 좋겠지만 아마도 대학이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너무 많은 의견을 내면 고등학교의 자율성을 침해한다고 비난받을까봐 의견을 내지 못하고 있나 보다.